한국에서 비행할 때 수많은 기장들과 함께 비행을 해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몇 명이 있다.
K사와 A사에서 기장들이 내가 있었던 항공사로 와서 파견직을 하거나 기장 승급을 해서 비행을 함께 하곤 했는데, 양 사간의 사이는 소문과도 같이 딱히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유달리 조종사 유니폼만 입으면 돌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어떤 특정 부분이 충족이 되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훈련생 신분일 때의 일이었는데 많은 훈련부기장들이 B기장과 함께 비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종사의 스케줄은 보통 한 달 전에 배포가 되어 누구와 어디로 비행을 가는지 미리 알 수가 있다.
미리 안다고 해서 좋은 점은 쉬는 날을 미리 알 수 있어서 나의 한 달 치 스케줄을 대충 조절가능하다는 점도 있으나, 부기장일 때의 안 좋은 점은 함께 임무 하기 싫은 사람과 가는 날을 한 달 전부터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유명한 B기장과 임무가 나와 2시간 일찍 회사를 가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리 다 보고 준비하려고 했던 비행계획서가 운항관리사에 의해 출력이 되어 전달되어야 하는데 바쁜 나머지 너무 늦게 받아 미처 다 보지 못한 와중에 해당 기장이 나타나 버렸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그 와중에 뚜벅뚜벅 걸어와선 정중하게 와서 극 존댓말로 '안녕하십니까, 오늘 oo비행을 함께하게 된 B기장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인사말과 함께 90도로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당황했지만 함께 인사를 드리고선 솔직하게 비행계획서를 늦게 전달받아서 미처 다 보지 못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다짜고짜 '넌 뭐 하는 새끼야?!! 훈련이 있으면 미리 와서 다 준비하고 숙지해야 할 것 아니야?!! 건방진 새끼가..' 하며 태어난 이후에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다른 사무실 직원도 많은 가운데 쩌렁쩌렁 소리를 질러버렸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아직 못 봤다고 반박을 할 수도 있었지만, 변명을 한다며 2차 피해가 발생이 될 수도 있기에... 그냥 죄송합니다만 연신 해댔다.
한국의 조종실 문화는 매우 경직되어 있다. 그 뿌리는 군대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과거에는 파일럿이라고 하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전투기를 타던 장교들이 전역 이후에 민간항공사에 나와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는 출신의 다양화가 많이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도 많은 선임 기장들은 공사 출신들이 많다. 항상 최고의 자리에서 대우를 받았으니 사회에 나와서도 선후배가 빵빵한 조직에서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물론 깨어있고 좋으신 분도 많다.)
웃긴 건 캐빈승무원들과의 있을 때는 정말... 세상 그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다. 아까 그 소리 지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가 된다. 뒤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공항에 회사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도착해서는 갑자기 한 승무원의 가방을 손수, 직. 접. 버스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뭐지..?? 하는 생각으로 쳐다본 이후엔 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내려다 준 가방이 본인이 의도한 승무원의 가방이 아닌 것을 발견한 기장이 그것을 다시 버스에 올리더니 원래 내려다 주려 했던 가방을 한참 동안 찾은 후 결국 내려주는 것을 보고 '이게 뭐지...' 싶었다. 해당 승무원은 최대한 자본주의적 미소를 띠며 몸 둘 바 했으나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항공기에 실제 임무하러 간 이후에 자그마한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과는 달리 훈련생 신분인 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외부 점검을 마치고 돌아온 기장이 이를 발견하고는 조롱하듯 꾸짖었다. [죄송합니다 x 1000]
당시에 조종사가 워낙 부족하여 최대한 훈련을 빨리 끝내어 기성 조종사로 써먹겠다는 회사의 압박에 많은 훈련부기장들이 비행을 많이 했다. 잦은 기압차와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머리는 핑핑 돌고 식은땀은 났지만 어떻게든 이 비행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엔진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고 Standard Call out이라는 절차가 있는데 비행의 각 단계와 절차에 따라 실제 육성으로 말을 하여 서로 확인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역시 조금 늦게 Call out을 하는 실수가 한번 발생했는데 잦은 비행으로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뭔가가 엄청난 진동과 함께 옆에 껴두었던 종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왼쪽을 보니 기장이 또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이걸 놓쳐?' '너 오늘 한번 뒤져볼래?' 등등.. 또 죄송합니다를 연신 퍼붓는 나.. 이젠 감정이 없이 죄송합니다봇이 되어버렸다.
이 날 비행은 어찌어찌 마무리가 되었고 훈련을 마치기 위해선 두 명의 교관에게 각각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B기장이 비행을 마친 후에 추천을 주었다. 훈련 중에는 항상 De-Briefing이라는 것을 거쳐서 오늘 어땠고 어떤 점이 개선점이고 미흡한 점인지 등등 교관과 함께 점검을 하는데 이때 '앞으로 내가 자네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겠어!' 하면서 추천을 주는 것이 아닌가?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어리둥절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강하면서 속으로는 따뜻한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아직도 모르겠다.
B기장에 대한 다른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동기에게 들은 얘기인데 해외에 하루 체류를 한 뒤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에서 생긴 일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비행 준비를 마치고 승객을 태우고 있는데 두 명의 승객이 오지 않은 상태였다. B기장은 누구보다도 정시성(예정된 시간에 출발/도착하는 것)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외국 현지 직원이 지금 두 승객이 오지 않았는데 오고 있는 상태라 조금만 기다려 주십사 하고 있었는데 마침 멀리서 두 명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B기장은 항공기 창문을 열더니 상반신을 바깥쪽으로 내민 후 ' 빨리 뛰어와 이 XX들아!!!! 지금 다들 니들 기다리고 있다!!!!'라고 장풍 쏘듯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동기는 너무나도 놀라 승객에게 소리를 질러도 되나, 이거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승객들이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기장은 방송으로 '지금 들어오시는 승객 두 분, 당신들 때문에 여기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출발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앉으세요!!'라고 얘기했고, 여러 사람에게 눈치를 받은 그 승객들은 다행히 컴플레인은 없었다고...
이렇게 고압적이고 화를 많이 내는 기장들이 아직 많다. 이로 인해 위급상황일 때 부기장들이 제대로 된 조언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과거 미국에서도 그랬고 여전히 인도, 한국, 일본 등 많은 나라에서도 기장과 부기장 사이의 Power Distance Index라고 하는 수치가 매우 높은 나라들이 많다. 이는 안전과 직결되어 있는 부분이라 PDI 지수가 높은 조종실 문화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외국 항공사에서 근무해 보니 정말 우리나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특히나 항공업계에서는 매우 안 좋은 문화가 많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는 운항승무원의 문제뿐 아니라 캐빈(객실) 승무원, 항공정비사, 항공사 내에서도 고질적인 문제이다.
선진 외항사에서는 기장과 부기장이 서로 일터에 와서 협력하며 안전하게 운항하고 돈 잘 벌어가자 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 같다. 부기장이 기장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다리를 꼬고 있어도 껌을 씹고 있어도 이것이 기장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은 반대다. 어디 건방지게 기장 앞에서 부기장이 감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 기장들 장난 아니지?라고 묻는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조금씩 세대가 교체될수록 문화가 바뀌고는 있지만 아직 갈길이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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